책 소개, 금융시장으로 간 진화론
2020. 1. 21. 17:23
제가 번역한 책이 출간되어 소개의 글을 씁니다. MIT슬론스쿨 교수이면서 헤지펀드 AlphaSimplex 그룹의 창업자인 앤드류 로(Andrew Lo)가 쓴 Adaptive Markets의 변역본 "금융시장으로 간 진화론(부크온, 2020년 1월)" 입니다.
출판시장이 갈수록 위축되는 가운데 그나마 미래전망이나 투자법에 대한 책은 제법 인기가 있는 편인데요, 이 책은 경영대학원 교수이자 헤지펀드 창업자가 쓴 책이고 제목에 금융시장이라는 단어도 들어가지만 안타깝게도 '돈 버는 기술'에 대한 책은 아닙니다. 경제학과 투자업계의 역사, 행동경제학과 뇌과학 등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모아놓은 다소 무거운 교양서입니다. 현대 금융경제학의 기초인 효율적 시장가설의 대안으로 '적응적 시장가설'을 제시하고는 있지만 '그러니 이러이러 해야 한다'라는 당위적 주장보다는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고 금융시장이란 어떤 공간인지 살펴보는 해설이 주가 되는 책입니다.
구체적인 내용을 소개드리는 것 보다는 왜 '진화론'이고 왜 이것을 굳이 금융시장에 적용해야 하는지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서구에서는 근대성(Modernity)을 대표하는 인식의 전환 사건으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다윈의 진화론을 꼽습니다. 종교재판의 서슬 아래 목숨을 걸고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중세의 개념을 부수면서 인류가 자연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고 과학혁명의 토대를 마련해주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다윈은 인간이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동물 진화의 우연한 결과라는 관념의 도약으로 인간이 인간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해주었습니다. 모든 것을 종교적 기준으로 판단하며 천 년 넘게 답보했던 인류가, 짧은 시간 놀라운 과학/산업/사회의 혁신을 이뤄낸 것은 지동설과 진화론으로 상징되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객관화' 덕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혁명이 한창 세상을 바꾸고 있던 20세기초 경제학은 인문학에 속한 학문이었습니다. 위대한 경제학자 중 하나인 케인즈가 1930년대 쓴 책을 보면 (수요-공급 곡선과 간단한 공식이 나오긴 하지만) 대부분은 인간 사회와 심리에 대한 성찰들이 장황하게 서술됩니다. 1950년대 현대 경제학의 지평을 연 새뮤얼슨은 이렇게 '썰'에 의지한 경제학이 싫었습니다. 수학천재(혹은 수학덕후?)였던 새뮤엘슨은 경제학에 수학적 방법론을 도입하여 경제학을 과학의 한 분야로 만들고 싶었고 실제로 그 바램을 이루어냈습니다. 그 덕분에 고교시절 수학이 싫어 문과를 택했던 저는 어쩌다 경제학과에 들어가 졸업할 때까지 행렬과 미분 계산으로 고통받았습니다.
엄밀한 수학을 도입한 새뮤얼슨은 경제학에서 코페르니쿠스적인 혁신을 이뤄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뮤얼슨의 수학모델은 인간의 경제행위가 예측가능한 합리성을 토대로 이뤄진다고 전제합니다. 하지만, 선택의 순간에서 오직 합리적인 기준으로만 판단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는 것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경제학이 합리성을 가정하고 과학적 도구들을 도압한 덕분에 금융시장이 급팽창하였고 글로벌 경제를 자본주의 틀 안에 거미줄 처럼 연결시킬 수 있었지만, 동시에 그 합리성을 너무 광범위하게 가정하면서 경제학의 목적인 현실설명력은 훼손되었습니다. 하지만 수학의 도입과 달리 경제학에 있어서 다윈적인 인식 전환은 오랜 기간 지연되다가 최근에 들어서야 이뤄지기 시작했습니다.
앤드류 로는 적응적 시장가설이라는 자신의 핵심 논증을 통해서 금융경제학의 다윈적 혁신을 시도합니다. 진짜 인간의 모습을 전제로 한 경제학을 하자는 것이지요. 금융시장 안에 놓여진 합리적이지 못한 인간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서 저자는 행동경제학, 뇌과학, 진화생물학의 다양한 개념들을 총 동원합니다. 공포에 주눅들어 합리적 판단을 일순간 포기하고, 급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 불완전한 직관에 의존하고, 잠깐의 실수 때문에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결정을 내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오락가락 갈대처럼 방황하는 인간의 모습이 인류 진화의 과정에서 어쩔 수 없기 갖게 된 속성이라는 과학적 연구결과들이 책의 전반부에 나옵니다. 또 한편으로는 생명을 건지기 위해 의학적으로 불가능한 고통을 참아내기도 하고 그야말로 '생각의 속도'로 혁신을 일으키며 이제까지 없던 접근 방법을 고안해 내는 인간의 모습을 인덱스, 헤지펀드와 같은 현대 금융기법의 성장 과정을 통해 보여줍니다.
이러한 관찰의 결과로서 책의 후반부에 도출되는 저자의 적응적 시장가설은 쉽게 말해 효율적 시장가설과 행동경제학을 합쳐놓은 '짬뽕'입니다. 금융시장에서 인간은 합리적이기도 하고 비합리적이기도 하면서 오락가락한다는 주장입니다. 어찌보면 금융경제학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역할과 다윈의 역할을 자기 혼자 다 해보겠다는 것인데, 사실 이것만으로는 주장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시장이 오락가락 한다는 것은 금융시장을 어느 정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직감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적응적 시장가설은 이 '오락가락'이 제멋대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고 최대한의 성과를 이끌어내려고 하는 인간의 욕심과 헌신에 의해 질서있게 작동하는 현상이라고 규정하면서 새로운 이론으로서의 위상을 확보합니다. 금융시장은 자산의 가격을 합리적으로 잘 평가하다가 어느 순간 이상한 상태로 날뛰며 비이성적으로 작동합니다. 이건 사고(accident)가 아니라 환경 변화에 대한 적응(adaptation)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앞으로 이런 변화를 어느 정도 예상하고 대응할 수 있게 됩니다.
가치투자 기법에 투자한 주식 펀드매니저는 최근 몇 년간 전세계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천문학적으로 풀려나간 유동성 덕분에 자산 인플레이션이 거의 모든 자산에서 도도하게 발생하고 있는 와중에도, '값싼 주식'에 투자하는 투자법은 시장이 좋았던 미국에서나 시장이 나빴던 한국에서나 공히 성과가 좋지 않았습니다. 가치투자자에게 주어진 선택은 이제껏 지켜왔던 투자철학을 버리고 시장을 추종하거나 아니면 가치투자의 최대 덕목인 장기적인 관점에서 고통을 인내하는 원칙을 지키며 버텨내는 것입니다. 저 역시 이 극단으로 나뉘는 선택지 사이에서 고민할 때 이 책을 접했습니다. 적응적 시장가설에 동의한다고 해서 무엇에 투자할지 결론이 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어떤 진리와 원칙 위에 구성된 정적인 구성물이 아니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환경에 대한 동적인 적응의 결과물로 바라보면 그동안의 원칙에 대한 불필요한 집착과 변화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서 조금 더 자유로워 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책 한 권만으로 내 자신이 '진화'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의 진화의 당위성, 진화에 대한 의지, 진화의 방법에 대해서는 조금 얻게 된 것 같습니다.
그 얻은 것을 나눠볼 수 있을까 하여 팔릴것 같지 않은 두꺼운 이론서를 내보려 했고, 동의해주신 부크온에서 (사장님께서 책에 나오는 '편도체에 각인된 공포'를 잠시 느끼시긴 했지만;) 책을 내주셨습니다. 번역은 창작에 버금갈만한 너무나 어려운 작업이라 애초의 의욕과는 달리 조악한 번역으로 책에 담긴 지식과 메시지가 살아나지 못한 것 같아 못내 아쉽습니다. 행여라도 2쇄를 할 수 있게 된다면 좀더 좋은 번역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